Luciole_#02
*
재활용 창고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잦아들 때까지도, 나타니엘은 마리네뜨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내가 더 다가가도 될까. 내가 좀 더 욕심을 부려도 될까…….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빌런 처리가 모두 끝났는지 레이디버그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시, 시, 십초 남았어…! …으앗."
레이디버그는, 다시 내가 아는 마리네뜨로 돌아와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알고 마리네뜨를 마주할 자신이 있을까. 나타니엘은 거듭 숙고했다. 생각에만 너무 몰두해 있었는지, 나타니엘의 스케치북이 그 손에서 툭- 떨어졌다.
"!"
"아……."
나타니엘은 급하게 스케치북을 주워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타니엘이 주저앉아 있는 구석으로 마리네뜨는, 몸을 돌렸다. 그는 조금 더, 뒤로 물러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막다른 곳에 숨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 나타니엘…?"
"…어. 아, 안녕… 마리네뜨?"
나타니엘은 바보같이, 그 말밖에 내뱉지 못했다. 마리네뜨도 너무나 당황스러운 전개에 할 말을 잃은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마리네뜨가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선생님 빌런이 나타나서 여기로 도망왔어. 아니아니, 이건 확인사살이다.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털어놓는 게 되어 버리고 말아. 어, 어떡하지?
"나타니엘, 네가 여기 어떻게…있어?"
"그, 그게 말이야. 마리네뜨, 나- 나는 그냥 여기가 조용해서 그림을……."
멍청이. 나타니엘의 머릿속에서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얽히다가 결국 남은 건 끊어진 털실 조각뿐이었으며 나타니엘의 정지된 사고 회로, 그리고 지금의 난장판이었다. 마리네뜨는 미심쩍은-아직 충격은 가시지 않은 듯했다-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고의가 아니라, 그게……. 네 그림을 그리다가… 아니 이게 아닌데……."
"후, 나타니엘. 혹시 뭔가를 봤다고 믿고 싶진 않지만… 혹시 봤다면, 그냥 잊어 줘."
마리네뜨가 비릿하게 웃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절대 말 안 할게. 어떻게 내가 너를… 조,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그러는 거 아니라고……. …헉."
자신도 모르게 나온 솔직한 말 한 마디에 마리네뜨와 나타니엘, 둘 다 적잖이 당황했다. 마리네뜨는 마치 검은색 크레파스를 마구잡이로 칠한 듯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타니엘은, 자기가 내뱉은 말을 다시 한 번 곰씹고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부끄러운 게 아니라, 마리네뜨에게 미안했다. 이미 충격받은 아이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미안했다. 농담이라고 운을 떼려는 순간, 마리네뜨가 조금 더 빨랐다.
"미안한데, 나타니엘. 지금 내가 너무 신경쓸 게 많아서. 그리고 지금 나는 좋아하는-"
"아니,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말하지… 말아 줘. 어차피 지금, 네가 답하면… 네 답은 뻔할 테니까."
당장 마리네뜨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녀가 누굴 좋아하는지- 누굴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던 듯, 다시 입을 열려던 마리네뜨는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그 짧은 공백에 나타니엘은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미소지으며 창고를 나갔다.
*
다음 날, 그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마리네뜨는 변함없었다. 언제나같이 밝았고- 웃는 모습이 예뻤다. 블루베리 한 바구니를 그대로 담은 듯 새큼한 남청빛 머리칼과 푸른 눈, 흰 피부는 어디 하나 푸석한 곳 없이 풋풋했다. 누가 보기에도 그날 그 일이 없었다는 듯이.
반면, 나타니엘은 며칠 새 굶기라도 한 듯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다. 원래 울적했던 이미지가 이제는 주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볼 만큼 가라앉았다. 파리의 새침한 아침 햇살도, 시원한 바람 내음도 나타니엘에겐 짐이 되어 마음을 짓눌렀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어지러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그 심경을 반영하듯, 그는 스케치북 몇 장을 움켜쥐어 조그맣게 구겨버렸다.
그리고 다시 헛웃음을 띠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머금으며.
그날 오후 마지막 수업은 일찍 끝났다. 아이들은 저마다 공책이나 핸드폰을 꺼내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오전에 받은 초콜릿-아드리앙이 반에 돌린 것이었다-을 꺼내 보며 소리 없는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 나타니엘이 그 분신과도 같은 스케치북을 꺼내려 가방을 들자, 공교롭게도 종소리가 터져나왔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아, 아드리앙이 나한테 초콜렛을 줬어……! 알리야, 나 어떡해……."
"…마리네뜨? 그거 반 애들한테 다 돌린 거잖아-. 나도 받았고 클로이도…"
"아니야! 나는 아드리앙이 초콜렛 줄때 웃어줬다구……! 어-어쩌지, 다시 편지를 써야하나? 뭐라고 쓸까? 좋아해? 사랑해? 나랑 결혼하자? 아니면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아드리앙은 집에서도 손에 물 안 묻히고 살텐데, 어떡하지?"
"오, 내 사랑하는 친구야. 제발 진정하고 집에 가서 머리나 식히자. 그건 그렇다 치고, 편지나- 음. 너 그림 잘 그리니까 그림 그려줘도 좋을 것 같은데?"
"…그렇구나……! 고마워, 알리야! 역시 넌 나의 진정한 친구야!"
응, 그래. 고마워. 알리야가 영혼 없는 대답을 건내며 마리네뜨의 어깨를 툭, 쳤다. 앞으로 휘청거린 마리네뜨는 '아프잖아!'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나타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마리네뜨는 급하게 눈을 피했다.
역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파래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
청명한 햇살이 부서지는 아침이 왔다. 날씨와는 맞지 않게, 나타니엘은 그날도 우중충한 먹구름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듯했다. 언제나 울리던 알람 소리, 늘 비슷하던 아침 식사. 변한 건 없었다. 접시 위의 나이프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의 어머니가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집에 있기가 어색해서였는지, 평소보다 일찍 책가방을 메었다. 학교 문은 이른 아침부터 열려 있었지만, 사람이 지나다니지는 않았다. 서늘하고 스산한 기운에 그는 몸을 떨었다.
이상하게도 교실은 열려 있었다.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까치발을 들어 교실 안을 살펴보니 인기척은 없었다. 학교 경비 아저씨가 문을 열어 놓고 퇴근하신 건가? 그는 잠깐 갸웃했지만 교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
초점 풀린 나타니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그림 한 장이었다. 아드리앙이 크게 그려져 있는 그림 한켠에는, 마리네뜨의 사인으로 추정되는 표시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Marinette. 필기체로 흘겨 쓴 그 표식은 하트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사인도 예뻤구나. 그 입가엔 살풋 미소가 지어졌다. 그림을 한 손으로 들고 훑다 그림 속 아드리앙에게 눈이 갔다. 첫 눈같던 옅은 웃음이 언제 웃었냐는 듯 사라졌다.
그래,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을 좋아했지.
나타니엘은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자신의 스케치북 속에 끼워넣었다. 마리네뜨의 그림이었기 때문도 있지만, 아드리앙이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욕심도 없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이 그림이 없어진 것을 알면 좋아할까. 좋아하겠지. 아드리앙이 그림을 가져갔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아닌 아드리앙에게 웃어주면서.
그저 나는 빛 바랜 반딧불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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