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ole_#01
*
어느덧, 촘촘히 짠 캔버스에 푸른 물감을 뿌린 듯 청명한 가을이었다. 새 학기는 시작한 지 벌써 한 달도 더 되었고, 반 아이들은 친해진 지 오래였다. 그, 나타니엘만 제외하고는. 원체 말이 없는 데다 낯가림도 심해서, 아이들과는 학기 첫날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쓸쓸하게 일 년을 보낼 것으로 단정하며 그는 펜을 집었다. 스스로를 한참 외로움에 가두고며 벙어리 봉제인형이 되고 있던 그에게 말을 건넨 건 마리네뜨였다.
“우와, 나타니엘 너 그림 진짜 잘 그린다!”
처음 듣는 칭찬. 처음 보는 미소. 나타니엘은 마리네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말없이 정지 상태만을 유지하고 있을 동안, 마리네뜨는 훌쩍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어느새 나타니엘의 얼굴은 그 머리색과도 같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부터였나, 텅 빈 그 스케치북 속에 한 소녀가 자리잡게 된 것이.
그가 읊조리길.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그녀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고.
*
그 일이 있던 건 그로부터 몇 주 후였다. 무슨 연유인지 마리네뜨의-나타니엘도 같은 반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빌런이 되어 학교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의 통제가 사라진 학생들은 뜻밖의 사건에 우왕좌왕했다. 아이들은 개미 떼처럼 교문으로 달려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레이디버그, 아니 마리네뜨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학교 안에서 발이 묶인 아이들이 건물 곳곳에 숨어들었고, 은밀히 변신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순간, 마리네뜨의 머릿속에 어느 장소가 스쳐지나갔다. 아, 재활용 창고! 소리 없이 탄성을 내지른 그녀는 당장 창고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티키, 나 정말 기발한 것 같아! 어쩜 이렇게 좋은 장소를 찾아낼 수가 있지?"
"오, 마리네뜨… 잘난 척이 너무 심하면 아드리앙이 싫어할 거야."
안타깝게도, 그녀의 선택은 썩 좋지 못했다. 그곳에는 마리네뜨 뿐 아니라 또 한명의 남자가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겠지만- 숨어 있었다. 나타니엘은 인기척을 듣고는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마리네뜨? 나타니엘은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는, 정말 그 마리네뜨? 폐지 더미에 가로막힌 건너편으로 눈을 힐끔 돌렸다.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가 생각한 그녀가 맞았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더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눈 앞에서, 그것도 같은 반의 여자애가, 사실은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었다면? 믿을 수 없었다. 눈 앞이 환하게 흐려지더니, 어느새 예쁘장한 여자아이는 붉은 히어로가 되었다. 그리곤 눈 깜짝할 새에 나타니엘의 앞에서 사라졌다.
*
마리네뜨, 아니 레이디버그가 나간 자리만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타니엘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뛰쳐나가 슬쩍 열려 있던 창고 문틈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평소의 마리네뜨가 새초롬한 개나리나 진달래였다면, 지금의 그녀는 강인한 캐모마일이나 듬직한 해바라기였다. 한동안 활약하는 레이디버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그는 창고 문을 잠그고 다시 그가 있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 틈새가 맞지 않는 듯 끼익, 하고 문이 다시금 열렸다.
마리네뜨가, 레이디버그였다. 도로 열린 문 틈새로 바깥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선생님…빌런은 지금쯤 레이디버그에게 처치당하지 않았을까. 나타니엘은 생각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았다. 길에 난 꽃처럼, 굳이 꺾어 내 손에 쥐고 있지 않아도 될,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 사심 담긴 마음을 드러내면, 더 이상 웃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더 이상 그 상냥한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결심했었다, 네 그대로를 바라만 보자고. 네가 누구와 함께하든, 누구를 좋아하든 저 멀리 뒤에서 응원해주자고.
그러나.
꽃은 햇님만 쫓더라. 가끔 네 눈이, 네 미소가 아드리앙만을 향할 때마다 질투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해가 지면…구석의 반딧불이를 바라봐줄까. 허투른 소리란걸 잘 알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알고 있지만…….
어설픈 반딧불이는 꽃을 사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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